[가업 잇는 100년 기업] 광주 전통장류 별미식품 공지사항 - 별미 쇼핑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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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 잇는 100년 기업] 광주 전통장류 별미식품

작성자 지현준(ip:)

작성일 2017-08-09 00: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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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 잇는 100년 기업] 광주 전통장류 별미식품

3대째 이어온 50년 전통 장류 명가
“사람·품질·베품의 경영… 위기 때도 유일하게 살아남아”

조성필 기자 gatozz@kyeonggi.com

별미식품사는 1965는 서울 신당동에서 문을 연 뒤 2017년 현재까지 3대에 거쳐 이어져 온 50년 전통장류 제조업체다. 조모, 아버지에 이어서 가업을 승계한 지현준 대표가 광주 곤지암 사무실에서 별미식품사 간판 브랜드 상품인 ‘소보꼬’를 들고 환히 웃고 있다. 전형민기사
▲ 별미식품은 1965년 서울 신당동에서 문을 연 뒤 2017년 현재까지 3대에 거쳐 이어져 온 50년 전통장류 제조업체다. 조모, 아버지에 이어서 가업을 승계한 지현준 대표가 광주 곤지암 사무실에서 별미식품 간판 브랜드 상품인 ‘소보꼬’를 들고 환히 웃고 있다. 전형민기자




소보꼬는 50년 전통 장류 제조업체 별미식품의 대표 브랜드다. 브랜드명인 소보꼬는 ‘소고기 볶음 고추장’의 줄인 말이다. 해당 브랜드는 한국 전통 고추장의 깊은맛에 한우, 전복, 새우의 영양을 더한 프리미엄 고추장을 선보이고 있다.

소보꼬는 꾸준한 인기와 훌륭한 제품 품질 등을 토대로 올해 7월 한국마케팅포럼에서 주관한 ‘대한민국소비자만족도 1위’ 시상식에서 식품(장류)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대표 장류 브랜드로 우뚝 선 소보꼬의 출발은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우리나라 대표 떡볶이 명소로 자리잡은 서울 신당동에서 소보꼬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 별미식품의 시작
산업화 이전이었던 1965년 서울 신당동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동네였다. 당시 부촌으로 통하긴 했지만, 그건 극히 국한적인 이야기였다. 주변은 논밭천지였고, 집이 뜨문뜨문 있다곤 하나 개 중엔 판잣집이 많았다.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어서 아침이면 공중변소 앞에 긴 줄이 늘어섰고, 새치기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변소 앞에선 늘 목불인견의 드잡이가 벌어지곤 했다. 속된 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의 풍경이었다.

“별미식품은 제 조부모님께서 만든 장류업체예요. 평양이 고향이신 할머니께선 전쟁통에 피난민 대열 속에 섞여 서울 신당동에 자리를 잡으신 뒤 평양냉면집을 운영하셨어요. 장사가 무척 잘 됐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독실한 기독교신자이셨던 할머니께선 냉면집 손님들이 자꾸 술을 달라고 하시는 게 싫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냉면집 문을 닫으시고 쌀고추장 장사를 시작하셨어요.”

별미식품 지현준 대표(34)가 들려준 회사의 시작이었다. 지 대표는 별미식품 창업주이자 초대 대표였던 고(故) 양재선 할머니의 손자다. 그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난 2015년부터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할머니께서 상당히 트이신 분이셨어요. 당시만 해도 쌀이 상당히 귀한 시기였잖아요. 고모님들 말씀에 따르면 할머니께선 쌀을 얻어서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부가 가치를 만들어야지만 남는 게 있을 상황이었어요. 할머니께선 고민 끝에 쌀을 이용해 고추장을 만들기 시작하셔서 옆동네인 왕십리 곱창집에 쌀고추장을 공급하셨어요. 다행히 왕십리 곱창집 사이에서 할머니 쌀고추장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거래를 시작한 몇몇 왕십리 곱창집에서는 지금까지도 고정적으로 저희 고추장을 써주고 계세요.”

너나없이 먹을 게 없던 시절, 고추장은 부동의 1순위 반찬이었다. 여기에다 왕십리 곱창집의 지지 덕분에 별미식품은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점차 덩치가 커지면서 별미식품은 서울 상일동에 자그만한 공장도 차릴 수 있었다. 버젓한 중견기업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양 할머니는 회사 성장 과정에서 쌓은 부(富)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썼다. 정기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쌀을 나눠줬고, 동네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이런 나눔활동으로 양 할머니가 서울 중구와 서울시로부터 받은 표창만 수십 개에 달한다.

별미식품은 1983년 공장부지를 경기 광주 곤지암으로 옮겼다. 서울에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지만 상일동 공장부지에 고속도로 개설 공사가 진행되면서 20년 가까이 정든 터를 떠나야 했다. 광주 곤지암으로 이전하면서 별미식품사 대표 자리도 바뀌었다. 양 할머니의 아들인 지명섭씨가 대표 자리를 이어 받은 것. 별미식품의 두 번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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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의 90년대

90년대로 접어들자 고추장업계 판도엔 큰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대상(현 청정원)과 제일제당공 (현CJ제일제당)이 고추장산업에 뛰어들면서 시장은 두 기업에 의해 양분화됐다. 두 공룡기업이 차지한 고추장의 시장점유율은 90%이상. 남은 10%를 놓고 소상공인들이 경쟁을 펼치는 모양새를 띠게 됐다.

문을 닫는 곳도 하나둘씩 늘기 시작했다. “90년대만 해도 광주에서 고추장과 된장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 30여 군데는 됐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대기업이 고추장산업에 진출하면서 점차 사라져 이제는 저희 별미식품 하나만 남게 됐어요.”

지 대표는 90년대 일었던 변화의 물결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로 ‘사람’을 꼽았다. “할머니도 그러셨고, 아버지도 사람관리를 정말 잘 하셨어요. 당장 손해를 보셔도 한 번 인연을 맺은 거래처 사람들과는 약속을 꼭 지키셨어요.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셨어요. 베품의 연속이셨죠. ‘주인 행세 하지말고, 늘 직원들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지 대표는 비결로 또 하나를 덧붙였다. “기본적으로 저희 제품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장맛은 쉽게 바꾸지 않으셨어요. 저희도 같은 제품을 계속 출시하면서 품질을 유지하다보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 차례 고비는 넘겼지만, 위기는 계속됐다. 대량생산에 이은 박리다매식 대기업의 물량 공세에 별미식품사는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갔다. 매출도 반토막이 나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그야말로 존페의 기로에 몰리게 됐다. 지 대표는 “아버지께서도 너무 힘든 나머지 몇 번이고 사업을 접을까 생각하셨다”고 했다.

지 대표가 가업에 뛰어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어릴 적 고추장, 된장을 멀리했어요. 다만 요리하는 걸 좋아했는데 고추장, 된장이 좋은 재료인 만큼 세련되게, 맛있게 만들면 케첩이나 마요네즈처럼 좋은 제품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어요. 또 제가 장류업체 대표 손자로,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고추장, 된장을 만드는 일은 할래야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이런 생각들이 집안일을 거드는 방향으로 연결됐어요.”

내리막길을 걷던 가업을 일으켜 세우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막막했던 게 사실이에요. 공장에서 일을 배우다가도 그 과정에서 한계가 느껴지더라고요. 정해진 것들만 배우니까요. 게다가 제품을 확산해야 하는데 이미 시장은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어 끼어들 틈이 없더라고요.” 한계를 실감한 지 대표는 2015년 중진공 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변화를 위한 포석이었다.

■ 소보꼬 그리고…
중진공 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 교육 과정을 밟으면서 지 대표는 장류업계 뿐 아니라 유통, 식품업계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심층 인터뷰를 했다. “고추장하면 일반적으로 냄새나고, 조리하기 어려운 제품으로 생각하시더라고요. 더욱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간편식을 선호하는데 고추장은 참 괴리감이 느껴지는 제품이었죠. 그래서 프리미엄으로 사람들이 보다 접근하기 쉽고, 소스 하나로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고추장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소보꼬는 이렇게 시작됐다.

소보꼬의 반응은 지 대표도 놀랄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소보꼬가 처음 판매된 곳은 광주의 한 어머니들의 모임. 규모가 작은 커뮤니티인지라 지 대표 스스로도 ‘이게 과연 팔릴까’라고 반신반의했다고. 하지만 준비해 간 소보꼬 30병은 1시간 만에 동이 났고, 엄마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타면서 주문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소보꼬는 이후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 등 프리마켓에서도 완판 행진을 이어갔고, 현재는 인터넷쇼핑몰, SM엔터테인먼트 SUM마켓, 쿠팡, 프리미엄 푸드마켓 등에서 활발히 유통되고 있다.

소보꼬의 인기에 힘입어 별미식품의 매출도 전년도 대비 60% 이상 껑충 뛰었다. 지 대표는 “소보꼬는 고추장 반, 한우 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며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물론이고 젊은 사람들 입맛에도 맞게끔 만든 게 주효한 것 같다”고 했다.

소보꼬 흥행에도 지 대표는 아직 ‘위기’라고 말한다. “소보꼬가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고비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아직 다 극복했다고 말한 순 없죠. 지금도 일손이 부족한데 충원은 되질 않고 있거든요. 저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설령 오늘까지 하고 그만둔다고 해도 제가 가진 역량을 다 발휘하고, 주위 분들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란 생각으로 일하고 있어요.”

지 대표는 다섯살배기와 일곱살배기, 두 자녀가 있다. “아이들이 이 가업을 이어 백년가업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느냐”는 질문에 지 대표는 미소를 지었다. “고추장을 파는 것이 100년을 할 수 있는 사업은 아닌 것 같지만, 아이들이 무척 좋아합니다. ‘소보꼬’, ‘소보꼬 사세요’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아이들이 가업을 승계한다면 좋은 회사로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하하.”

조성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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